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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영정` 상주 귀환은 `원칙과 소신` 지키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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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작성일16-10-23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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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500년 역사에서 대표적인 '청백리(淸白吏)'를 꼽는 다면 단연코 '황희(黃喜.1363~1452)' 정승이 으뜸일 것이다. 조선조에 재상을 역임하면서 청백리로 거론되는 인물은 불과 18명 뿐이다. 그 가운데 황희를 첫 번째로 꼽는 이유에 대해 현시점에서 곰곰이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황희의 출생지는 황해도 개성 가조리였다. 출생은그렇지만 그의 업적과 품성을 추모한 것은 사후 51년인 조선 중종 때 상주 '옥동서원(玉洞書院)'이 건립되며,여기에 '영정(影幀)'이 봉안됐다. 이밖에 그의 영정은 장수의 창계서원,파주의 반구정에도 있었지만,반구정의 경우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 그러나 이중 옥동서원에 있던 황희  영정이 지난 2008년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반출됐다. 당시 이유로는 보관과 관리의 어려움에 대한 판단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황희 영정이 무려 567년간 한 곳에서 보관되었다가 서울로 간 것도 이유가 있었지만,다시 상주로 온 것은 더욱 의미가 있다고 본다.
 황희의 '상주 귀환'은 '희망 상주21' 부설기구인 상주 문화재환수추진위원회와 옥동서원,상주박물관 등이 반출된 문화재를 되찾기 위해 끈질긴 노력 끝에 일궈낸 훌륭한 결과물이다.
 그의 영정은 62세었던 1424년에 그려진 2개 본 중 하나의 원본이다. 이 영정이 옥동서원을 비롯 나주 녹덕서원 등에 모사본이 있다는 것을 엄밀히 해석하면, 그가 공직자(公職者)로서 청렴결백(淸廉潔白)의 표상이었기 때문이다.
 황희는 조선 태종,세종,문종에 이르는 3왕을 섬기면서 24여년간 재상직을 수행한 명재상이자 조선조 최장수 재상(宰相)이다. 정치 일선에서 '원칙과 소신'을 견지하면서도 때로는 '관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조선 사직이  500년 유지되는데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특히,그는 재상에 오르기 전까지  국정에 대한 진언으로 수차례 '파직'을 당하는 등 '복지부동'이 아닌 '소신(所信)'을 보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그의 처신과 진실성,그리고 '사심'이 아닌 '충심(衷心)'이  군주로부터  인정을 받아 핵심참모로서 진가를 발휘했다. 더욱이 그의 나이 아흔 줄에 들어서서도 국사(國事)를 챙겼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출중했다는 것이다.
 황희가 이 시대에도 다시 주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은 '원칙과 소신' 그리고 '관용'의 대표적인 공직자였기 때문이다. 그의 영정이 8년간 다른 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제자리인 상주로 왔다는 것은 반출문화재의 '원위치'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황희의 상주 귀환'은 평소 그가 강조한 '원칙'이었기에 당연한 것이다. 또한,오늘의 공직자들이나 정치권이 그의 정신을 되새기도록  기회를 준 것 또한  '황희의 상주 귀환'이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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