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무흠 특별기고] 경주 덕동댐과 함께 사라진 원효의 향기 고선사 > 실시간

본문 바로가기


실시간
Home > 건강 > 실시간

[홍무흠 특별기고] 경주 덕동댐과 함께 사라진 원효의 향기 고선사

페이지 정보

원효사상 대표 전 서울외대 … 작성일20-11-15 18:39

본문

↑↑ 원효사상 대표 전 서울외대 겸임교수 홍무흠고선사는 경주 시내에서 감은사가 있는 동해로 넘어가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절은 우리나라의 최고 승려로 꼽힐 뿐만 아니라 불교사 적으로는 세계적인 사상가로 평가되고 있는 원효대사가 주석했던 사찰이다. 원효의 저술이 103부 210권으로 당나라 현장법사보다 훨씬 더 많은 저술과 백성들을 애민하는 정신인 무애와 화쟁의 큰 행적을 남겼다. 이를 잠깐 비추어 봐도 고선사는 역사적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없는 사찰인 것은 분명하다.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우선 10세기에 저술된 송나라 때 찬영이 왕명으로 저술한 '송고승전'의 '당신라국황룡사사문원효전'이 있고, 다음으로는 13세기 고려시대 승려 일연이 저술한 역사서 '삼국유사'에 수록된 '원효불기'가 있다. '삼국사기'에도 원효와 관련 있는 기록이 조금 보인다.
   그러나 이보다 이백 년에서 오백 년 앞선 8세기에 원효의 생몰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서당화상비'문이 고선사에 세워져 1300년의 세월을 지내왔었다. 이 비는 원효의 손자 설중업이 779년부터 2년간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일본에서는 이미 원효의 저술들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러한 기록이 담긴 '삼국사기'에는 또한 일본 나라시대 실력자이자 최고 문호인 오미노 미후에가에게서 원효의 저술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찬사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삼국사기' 제46권에는 원효의 저작들이 신라만큼이나, 어쩌면 신라보다 더 일본과 당나라에 알려져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일본에서 원효의 저술들을 읽고 그 사상을 흠모하고 있던 터에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가 임을 알고 극진히 대접하면서 원효를 극찬한 것에 크게 감명했다. 당시만 해도 신라에서는 원효의 저술과 사상이 올바로 전해지지 못했던 점을 참담해 했던 설중업은 귀국 후 신라조정 등에, 원효가 일본에서 성사로서의 존중받고 있는 사실을 소상히 알렸다. 이에 당대 최고의 실력자이자 후일 헌덕왕(809~825년)이 된 각간 김언승의 후원으로 애장왕(800~808년) 때 고선사의 도량 정비와 원효대사를 기리는 서당화상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는 높이 86cm 너비 93cm 드께 23cm이고 아래 받침대 귀부는 거북 모양이다. 비문의 내용은 원효의 탄생과 학문을 한 모습, 그리고 원효의 대표 저술인 '십문화쟁론'의 성격과 원효의 신비한 행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원효대사의 명성이 일본에 알려졌다는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이 비는 원효의 일대기를 정리한 최고의 자료로서 현재 원효 연구에 활용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에는 '원효스님은 지방을 두루 교화하고 수공 2년 686년 3월 30일 일흔의 나이로 혈사에서 입적했다'는 기록으로 원효의 생몰을 고증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므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고 할 것이며, 수공은 당나라 측천무후의 연호이다. 비문의 글씨는 2cm 크기고 행서체로 총 33행으로서 필체가 뛰어나다고 평가된다.
   고선사는 가람 배치가 금당 구역과 탑 구역이 나란한 형태를 이룬 국내 유일의 사찰 가람 배치이다. 금당을 중심으로 앞에는 중문 뒤에는 강당이 배치되어 있고 사방을 회랑이 둘러싸고 있다. 탑이 있던 곳도 회랑을 두른 모습이다.

  또한 고선사 삼층 석탑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와 함께 감은사 쌍탑을 언급해보면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삼층석탑으로 고선사와 감은사 탑에서 출발 된 오묘한 석탑의 기법이 불국사 석가탑으로 완성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고선사에는 너무나 중요한 금석문 사료인 서당화상비와 통일신라의 석탑 기법 등으로  온전히 원효대사의 향기를 가득히 품고 있었다.
   원효와 예술을 간직하면서 언제 폐사가 된지는 알 수 없지만, 1300년을 이어온 고선사는 1915년 5월 조선총독부 참사관실에서 실시한 한국 금석문의 수집과 정리를 하던 중 3편으로 조각난 서당화상비를 발견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그 조각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제지공장에 있었다가, 해방 후 1968년 그 공장 지역이었던 동내 민가에서 발견되었다.
   1975년 경주 일대 생활용수와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덕동댐 건설시 고선사를 수몰할 것을 결정하고 문화재 발굴사업을 진행하였다. 1962년 국보 제38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서당화상비의 귀두, 석등 대석, 주춧돌, 장대석은 국립경주박물간의 뜰에 옮겼다. 그리고 서당화상비의 조각난 상단부는 동국대 박물관에 하단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있다. 너무나 대책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선사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문화유산임이다. 여타의 불교 폐사지와는 그 성격이 확연이 다르다. 수몰 45년째, 고선사가 역사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 지금이라도 역사의 자취를 다시 찾아 수몰된 고선사의 인근 위치에라도 옛 가람을 조성해야 할 것이라 생각이 간절하다.
원효사상 대표 전 서울외대 …   kua348@naver.com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개인정보취급방침 서비스이용약관 이메일무단수집거부
Copyright © 울릉·독도 신문. All rights reserved.
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