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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 (3-6)] 고립서 벗어나 유라시아로 -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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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작성일21-01-2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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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경북신문=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경북신문이 주최한 '2020 신라왕들의 축제'에서 열린 학술대회 '포스트코로나시대 신라왕들에게 길을 묻다'에 참가한 학자들의 발표문을 연재한다. 신라왕들과 신라인의 창조적인 글로벌 의식과 혜안을 통해 코로나19 이후의 새롭게 전개될 세계를 적응하는 지혜를 얻기를 기대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등장한 흉노
   신라인들은 왜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을 스스로 흉노로 자처했을까. 그 배경을 신라인의 입장에서 신라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를 보면 단서가 나온다.
   삼국시대 신라를 둘러싼 백제, 고구려 그리고 북방의 부여와 북부여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이 세 나라의 왕족들은 모두 부여계였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부여에서 갈려나와 나라를 건국했다. 백제도 비류와 온조의 시절부터 마지막 의자왕까지 모두 부여씨였다.
   신라를 비롯한 모든 나라들은 자신들의 지배구조를 강화하기 위하여 다양한 사회와 이데올로기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신라도 국력을 강화하면서 다른 부여계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선민의식이 필요했다. 이에 진한시기부터 이어져왔던 북방과의 교류를 전면에 내세우며 부여계의 다른 나라들과는 다른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런 신라의 선택은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니었다.     당시 유라시아 초원은 흉노의 영향을 받은 유목민들이 강력한 무기를 앞세워 세력을 키웠다. 중국의 북방도 예외는 아니어서 위진남북조시대가 되어 북방의 이민족들이 앞다투어 서로 발흥하고 전쟁을 하는 극도의 혼란의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 특히 랴오닝 지역에서 발흥한 모용선비는 고구려와 맞서는 과정에서 강력한 기마술과 무기로 동북아와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신라와 가야의 무기와 마구(말갖춤)은 모용선비 계통이라는 것은 고고학계의 정설이다.
   이렇듯 신라가 흉노의 후예를 자처한 것은 당시 가장 선진적이었던 북방지역과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들의 선진적인 무기와 기술을 받아들여 다른 삼국과 맞서겠다는 속뜻이 숨어있다.
   신라가 북방의 유적과 유물을 남기고 흉노임을 내세웠다고 해서 21세기의 관점으로 비하하거나 간과할 필요는 없다. 또한, 진한시절에 만리장성 지대에서 사람들이 유민이 왔다고해도 그들이 신라인의 다수를 차지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니 지나친 전파론적 관점에서 기마민족이 남하해서 신라 정권을 탈취했다는 식의 주장은 근거가 박약하다. 반대로 당시 한반도는 물론 북방 유라시아의 여러 상황들은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흉노같은 초원의 유목문화는 너무 멀어서 설마 관계가 있을까 의심하는 좁은 시야도 버려야한다.
   당시 흉노는 유럽에서 아시아에 이르는 유라시아의 전역에서 일종의 롤모델같은 강국이었음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유는 그들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정확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흉노와의 관련을 강조하고 국력을 키운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후발주자로 삼국을 통일했던 신라는 강력한 자신만의 왕권을 구축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빠르게 키울 수 있었다. 몇몇의 증거를 혈통적인 흐름으로 해석하고 현대의 편견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신라의 입장과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계속>
경희대 사학과 교수 강인욱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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