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의 라오스로 소풍갈래?] 기약 없기에 더욱 그리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유토피아 `방비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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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 작성일20-08-20 19:34본문
↑↑ 나비계곡을 자전거로 달리는 서양 여행자들.
[경북신문=이상문기자] 쏭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넜습니다. 중간쯤 건너다가 심하게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잠시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원래 이런 것 아닙니까? 아슬아슬 부실한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 삶의 중간쯤에서 한 두 번의 위기를 겪는 것. 나는 이 다리를 건너 나비가 지천으로 날아다니던 계곡을 걸었습니다. 과거 내가 이 마을을 처음 방문했을 때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계곡을 가득 날아다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계곡을 나비계곡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물론 나 혼자 지은 이름이어서 널리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나무다리조차 없던 시절 나뭇잎 같은 쪽배를 타고 쏭강을 건너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 때 나를 도강시켜줬던 사공의 얼굴이 선합니다.
어느 해 다시 계곡을 찾았을 때 그렇게 많던 나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기야 인적이 드물던 계곡이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혼잡한 유원지처럼 변하고 말았으니 적요한 하늘에서 너울너울 날갯짓 하던 나비들이 사라져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계곡을 채웠던 나비들은 인적을 피해 더 깊은 계곡으로 거처를 옮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이 계곡에 나비 대신 날개는 없지만 사뿐한 몸짓으로 산과 들, 강이 베풀어 놓은 바람을 맞으며 걷거나 달리는 젊은이들이 생겨났으니 크게 유감은 아닙니다. 자연을 누리는 주인은 세월에 따라 바뀌는 법이니 훗날 인기척이 다시 뜸해질 쯤에 누가 이 계곡의 주인이 될지 궁금하긴 합니다.
계곡을 따라 걸으면 작은 마을이 등장하고 마치 50여 년 전 우리의 고향집을 연상시키는 집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친척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도 성냥불을 그어 불씨를 살려야 하고 흙먼지, 땀에 전 옷을 빨아 햇살에 널어야하기에 소소한 물건을 파는 가게도 보입니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가게의 좌판은 모두 쓸어 한 집의 살림살이를 해도 모자랄 것 같이 듬성듬성합니다. 그래도 가게를 지키는 아낙이 있고 아낙은 심심풀이로 호박씨앗을 까고 앉았습니다.
계곡은 쏭강 주변의 여러 동굴 가운데 가장 볼만한 탐푸캄까지 이어집니다. 그 길에 작은 개울이 몇 개 더 흐르고, 그 개울에서 멱 감는 아이들과 들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여행객들이 넘쳐나도 자연은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습니다. 다행히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은 자신을 품어주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자박자박 걷거나 자전거로 내달리며 세상에 흔하지 않은 유토피아에 순응합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자연도 인간도 여기에서는 참 아름답습니다.
↑↑ 쏭강에서 튜빙을 마친 여행자들이 강변으로 돌아오고 있다.
땀이 흐르면 쉬어갑니다. 그늘에 앉으면 금세 땀이 식기도 합니다. 비가 내리면 고스란히 맞아도 됩니다. 젖은 몸으로 계곡을 걸으면 발아래 느껴지는 흙덩이가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한 발 한 발 탐푸캄까지 걸으며 내 몸을 옥죄고 있는 도회의 거푸집을 털어내고, 정말이지 말간 알몸이 되고 싶습니다. 원시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미워했던 사람을 잊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보고 싶습니다.
탐푸캄 앞에 대갓집 마당만한 크기의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개울물이 흐르다가 동굴 밑 계곡에서 한 번 모여 쉬어가는 모양입니다. 물빛이 옥색입니다. 이 물이 흘러 방비엥의 마을을 감고 흐르는 쏭강의 수위를 높입니다. 방비엥이 아름다운 마을인 것은 아마도 이 옥빛 물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나비처럼 나풀나풀 이곳까지 온 젊은이들은 이 물웅덩이에 풍덩풍덩 자맥질합니다. 더위도 씻고, 욕망도 씻고,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씻습니다. 이 웅덩이는 원래 이름이 없었습니다. 탐푸캄 앞 웅덩이 정도로 지칭됐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블루라군'이라는 기가 막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어느 눈치 빠른 여행업자가 붙인 이름이 분명합니다. 라군은 바다에서 분리된 호수나 웅덩이를 말합니다. 사방팔방 바다 한 조각 없는 라오스에 라군이라니, 푸훗 하고 웃음이 났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라군보다 더 아름답기에 그 정도의 객쩍은 이름 짓기는 애교로 봐주기로 했습니다.
↑↑ 쏭강을 가로지르며 놓인 나무다리.
옥빛 물속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소리 높여 웃습니다. 웃음소리가 탐푸캄의 산자락을 감고 돌고 웅덩이 위 물보라를 일으킵니다. 웅덩이 옆 키 큰 나무에 그네를 매어두고, 사다리를 놓아 어른 키 세 길 정도 되는 물속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뒀습니다. 용기 있는 젊은이가 높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면 모두들 그 젊은이를 응시하고 아찔한 높이에 겁먹고 머뭇거리면 카운트다운을 해 다시 용기를 불러 넣어줍니다. 눈을 질끈 감고 물속으로 뛰어들면 바라보던 젊은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박수도 보냅니다. 블루라군에 모인 젊은이들은 이 때 국적도, 이념도, 지위도 다 벗어버립니다. 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우애로운 독립공간입니다.
세상을 떠나 이곳 라오스의 한적한 시골 방비엥에 와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런 평화를 갈구했습니다. 고단했습니다. 사람이 무섭고 세상사가 버거웠습니다. 이유 없이 몸이 달아오르고 벌컥 화가 돋기도 했습니다. 몸속 가득 독소가 번진 듯 했습니다. 방비엥에 와서 속진을 씻습니다.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어서 사람을 상대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뿐입니다. 방비엥에서는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시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여기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유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 쏭강변의 리조트.
다시 쏭강 어귀 마을로 돌아갑니다. 방비엥에서는 자연에 있거나 마을에 있거나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이미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이 물들인 색을 입고 풋풋한 향기를 냅니다. 내가 살던 땅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니까요. 해질 무렵 파동산을 물들이는 노을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산의 정수리에 노을이 물들면 강변마을의 집들이 하나 둘 등을 밝힙니다. 하늘 위 별들이 지상으로 내려앉는 순간입니다.
다시 돌아가면 쏭강의 물소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나비계곡을 가득 채우던 바람을 느낄 것입니다. 블루라군에 울려 퍼지던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흉내 낼 것입니다.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올지 기약이 없습니다. 기약이 없기에 더욱 그리울 것입니다. 내가 이곳을 떠나도 누군가 나처럼 나비계곡을 걸을 것입니다. 그도 나와 같이 이곳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고 모든 흔들림에 오감을 열 것입니다. 오늘은 방비엥의 어둠이 내게 깊은 안식을 줄 것 같습니다.
이만 쓰겠습니다. 내가 떠난 나비계곡을 걸을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내가 걸었던 이 길을 걷고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흥을 오롯이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이상문 iou518@naver.com
[경북신문=이상문기자] 쏭강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건넜습니다. 중간쯤 건너다가 심하게 흔들리는 다리 위에서 잠시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원래 이런 것 아닙니까? 아슬아슬 부실한 나무다리를 건너는 것. 삶의 중간쯤에서 한 두 번의 위기를 겪는 것. 나는 이 다리를 건너 나비가 지천으로 날아다니던 계곡을 걸었습니다. 과거 내가 이 마을을 처음 방문했을 때 알록달록 형형색색의 나비들이 계곡을 가득 날아다니던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계곡을 나비계곡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물론 나 혼자 지은 이름이어서 널리 불리지는 않았습니다. 나무다리조차 없던 시절 나뭇잎 같은 쪽배를 타고 쏭강을 건너 다녔습니다. 지금도 그 때 나를 도강시켜줬던 사공의 얼굴이 선합니다.
어느 해 다시 계곡을 찾았을 때 그렇게 많던 나비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기야 인적이 드물던 계곡이 여행객들로 북적이는 혼잡한 유원지처럼 변하고 말았으니 적요한 하늘에서 너울너울 날갯짓 하던 나비들이 사라져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계곡을 채웠던 나비들은 인적을 피해 더 깊은 계곡으로 거처를 옮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는 이 계곡에 나비 대신 날개는 없지만 사뿐한 몸짓으로 산과 들, 강이 베풀어 놓은 바람을 맞으며 걷거나 달리는 젊은이들이 생겨났으니 크게 유감은 아닙니다. 자연을 누리는 주인은 세월에 따라 바뀌는 법이니 훗날 인기척이 다시 뜸해질 쯤에 누가 이 계곡의 주인이 될지 궁금하긴 합니다.
계곡을 따라 걸으면 작은 마을이 등장하고 마치 50여 년 전 우리의 고향집을 연상시키는 집에서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친척 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도 성냥불을 그어 불씨를 살려야 하고 흙먼지, 땀에 전 옷을 빨아 햇살에 널어야하기에 소소한 물건을 파는 가게도 보입니다. 판자로 얼기설기 엮은 가게의 좌판은 모두 쓸어 한 집의 살림살이를 해도 모자랄 것 같이 듬성듬성합니다. 그래도 가게를 지키는 아낙이 있고 아낙은 심심풀이로 호박씨앗을 까고 앉았습니다.
계곡은 쏭강 주변의 여러 동굴 가운데 가장 볼만한 탐푸캄까지 이어집니다. 그 길에 작은 개울이 몇 개 더 흐르고, 그 개울에서 멱 감는 아이들과 들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여행객들이 넘쳐나도 자연은 그 많은 사람들을 모두 끌어안습니다. 다행히 이곳을 찾는 여행객들은 자신을 품어주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자박자박 걷거나 자전거로 내달리며 세상에 흔하지 않은 유토피아에 순응합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자연도 인간도 여기에서는 참 아름답습니다.
↑↑ 쏭강에서 튜빙을 마친 여행자들이 강변으로 돌아오고 있다.
땀이 흐르면 쉬어갑니다. 그늘에 앉으면 금세 땀이 식기도 합니다. 비가 내리면 고스란히 맞아도 됩니다. 젖은 몸으로 계곡을 걸으면 발아래 느껴지는 흙덩이가 한없이 부드럽습니다. 한 발 한 발 탐푸캄까지 걸으며 내 몸을 옥죄고 있는 도회의 거푸집을 털어내고, 정말이지 말간 알몸이 되고 싶습니다. 원시의 자유를 만끽하면서 미워했던 사람을 잊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나직하게 불러보고 싶습니다.
탐푸캄 앞에 대갓집 마당만한 크기의 물웅덩이가 있습니다. 개울물이 흐르다가 동굴 밑 계곡에서 한 번 모여 쉬어가는 모양입니다. 물빛이 옥색입니다. 이 물이 흘러 방비엥의 마을을 감고 흐르는 쏭강의 수위를 높입니다. 방비엥이 아름다운 마을인 것은 아마도 이 옥빛 물이 흘러 들어가기 때문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나비처럼 나풀나풀 이곳까지 온 젊은이들은 이 물웅덩이에 풍덩풍덩 자맥질합니다. 더위도 씻고, 욕망도 씻고,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씻습니다. 이 웅덩이는 원래 이름이 없었습니다. 탐푸캄 앞 웅덩이 정도로 지칭됐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블루라군'이라는 기가 막힌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어느 눈치 빠른 여행업자가 붙인 이름이 분명합니다. 라군은 바다에서 분리된 호수나 웅덩이를 말합니다. 사방팔방 바다 한 조각 없는 라오스에 라군이라니, 푸훗 하고 웃음이 났습니다. 하지만 세상 어느 라군보다 더 아름답기에 그 정도의 객쩍은 이름 짓기는 애교로 봐주기로 했습니다.
↑↑ 쏭강을 가로지르며 놓인 나무다리.
옥빛 물속에 뛰어든 젊은이들이 소리 높여 웃습니다. 웃음소리가 탐푸캄의 산자락을 감고 돌고 웅덩이 위 물보라를 일으킵니다. 웅덩이 옆 키 큰 나무에 그네를 매어두고, 사다리를 놓아 어른 키 세 길 정도 되는 물속에 뛰어들 수 있도록 해뒀습니다. 용기 있는 젊은이가 높다란 나무 위로 올라가면 모두들 그 젊은이를 응시하고 아찔한 높이에 겁먹고 머뭇거리면 카운트다운을 해 다시 용기를 불러 넣어줍니다. 눈을 질끈 감고 물속으로 뛰어들면 바라보던 젊은이들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고 박수도 보냅니다. 블루라군에 모인 젊은이들은 이 때 국적도, 이념도, 지위도 다 벗어버립니다. 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우애로운 독립공간입니다.
세상을 떠나 이곳 라오스의 한적한 시골 방비엥에 와 있습니다. 오랫동안 이런 평화를 갈구했습니다. 고단했습니다. 사람이 무섭고 세상사가 버거웠습니다. 이유 없이 몸이 달아오르고 벌컥 화가 돋기도 했습니다. 몸속 가득 독소가 번진 듯 했습니다. 방비엥에 와서 속진을 씻습니다.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어서 사람을 상대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뿐입니다. 방비엥에서는 어느 누구도 미워하거나 시기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여기는 세상에 남은 마지막 유토피아이기 때문입니다.
↑↑ 쏭강변의 리조트.
다시 쏭강 어귀 마을로 돌아갑니다. 방비엥에서는 자연에 있거나 마을에 있거나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이미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이 물들인 색을 입고 풋풋한 향기를 냅니다. 내가 살던 땅의 안부가 문득 궁금해집니다. 다시 돌아가야 할 곳이니까요. 해질 무렵 파동산을 물들이는 노을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산의 정수리에 노을이 물들면 강변마을의 집들이 하나 둘 등을 밝힙니다. 하늘 위 별들이 지상으로 내려앉는 순간입니다.
다시 돌아가면 쏭강의 물소리를 기억할 것입니다. 나비계곡을 가득 채우던 바람을 느낄 것입니다. 블루라군에 울려 퍼지던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흉내 낼 것입니다. 언제 다시 이곳에 돌아올지 기약이 없습니다. 기약이 없기에 더욱 그리울 것입니다. 내가 이곳을 떠나도 누군가 나처럼 나비계곡을 걸을 것입니다. 그도 나와 같이 이곳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이고 모든 흔들림에 오감을 열 것입니다. 오늘은 방비엥의 어둠이 내게 깊은 안식을 줄 것 같습니다.
이만 쓰겠습니다. 내가 떠난 나비계곡을 걸을 꿈을 꾸면 좋겠습니다. 내가 걸었던 이 길을 걷고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감흥을 오롯이 느끼게 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이상문 iou5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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